조선일보의 10월 16일자 칼럼 ‘나라인가 아내인가’ 를 ‘흥미롭게’ 읽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가장 시급한 국정현안인 김건희 여사 문제를 다룬 주제가 나의 관심사와 일치했고 <햄릿>이 연상되는 간결한 제목도 잘 뽑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용은 꽤 당황스러웠다.
칼럼의 필자인 김영수 영남대교수는 고려말부터 조선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왕조의 군주들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사례로 들어 ‘공’(나라)과 ‘사’(아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있을 윤석열 대통령의 공적 결단을 촉구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리어왕은 왕가의 사랑을 개인의 문제로 오인해서 망했으며, 공민왕은 아내 잃은 슬픔에 함몰되어 망해가는 왕조를 수렁으로 몰았다. 이성계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권력에서 밀려났고, 이방원은 자신과 자식의 처가를 제거해 조선의 기틀을 닦았으며 명성왕후가 좌지우지한 조선은 열강의 싸움터가 되면서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 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리어왕과 공민왕, 이성계의 실패는 지금의 윤 대통령을, 나라를 망하게 한 명성황후는 김 여사의 국정개입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인가 싶고 ‘과연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나의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김영수 교수는 다음 문단에서 ‘왕과 대통령은 다르다’ 고 잠깐 브레이크를 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결국 ‘아버지 태종의 처가 멸문을 인내한 세종’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예로 들더니, ‘진정한 통치자의 과업은 인간성의 시련이다’ 라는 장엄한 문장으로 윤석열 대통령에게 고언한다. ‘나라와 아내,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
“전하~ 사사로운 정을 버리시고
중전마마에 대한 검찰의 처분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정치를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정치인과 정치 이벤트를 봉건왕조에 비유하는 것은 꽤 자주 있는 일이다.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이들은 ‘대권’ 에 도전한다고 표현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대선주자들은 ‘잠룡’, 지지율이 낮은 대선주자 워너비들은 ‘잡룡’ 이라고 부른다. 여의도에는 대권주자를 만들고자 하는 수많은 ‘킹메이커’ 들이 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선거캠프에서 ‘책사’ 로 활동하다가 청와대나 정부에 ‘입성’ 한다. 대통령이 화가 나면 ‘격노’ 로 표현되고, 어딘가의 오더를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검경의 움직임은 ‘하명수사’ 라고 한다.
얼마 전에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김여사를 비판하며 그를 ‘위리안치 (圍籬安置·죄인을 귀양 보내 울타리를 친 집에 가두는 형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과거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대장동 비리의혹에 대해 비판하자 그를 ‘'봉고파직‘(封庫罷職·관가의 창고를 봉하고 파면함) 해 ‘위리안치’ 시켜야 한다’ 고 한 적이 있다. 탄핵의 기운이 한창이던 2016년 연말에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강물(백성) 이 화가나면 배(임금) 을 뒤집을 수 있다) 였다. 최근 계속되는 여권의 '독대' 논란도 어처구니 없긴 마찬가지다. '독대' 라는 구시대 언어와 윤대통령의 속좁은 태도 탓에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공적인 일이 대단히 이례적인 사건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여러 기사와 방송 평론에서 윤 대통령은 '독대' 를 허하지 않은 왕처럼 묘사된다. 국회의원들이 입만 열면 쓰는 ‘민심’ 이니, ‘국민의 눈높이’ 니 '낮은 자세' 운운하는 말도 사실 다 봉건적 언어다. 정치인 자신들이 국민들 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낮게(눈높이!) 살피겠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이렇듯, 봉건적 언어들은 21세기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정치의 곳곳에 녹아들어있다. 언론과 정치인들도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지, 자기 홍보에 그런 언어와 개념을 서슴없이 가져다 쓴다.
2012년 18대 대선이 시작될 국면에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박근혜 당시 후보를 칭송하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어서 발전할 수 있었다’ 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 ‘저게 할 소린가’ 싶어 웃었는데 10년이 더 지난 2024년에도 대선주자들은 본인 의도든 아니든 ‘왕’ 이나 ‘용’에 비유되고 대통령이 되면 또 어김없이 ‘격노’ 를 한다.
최근에 이런 ‘왕 마케팅’에 가장 열심이었던 건 이재명 대표와 ‘그의 민주당’이다. 대선 국면에서 이재명 대표는 몇몇 인사들에 의해 무려 ‘정조’(!!) 와 ‘이순신'(!!!) 에 비견됐다. 지금은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모 인사가 쓴 책은 ‘이재명의 출마선언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정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고 하니 이정도면 여의도 인터스텔라가 따로 없다. 어떤 이는 이재명 대표의 추천으로 지명직 최고위원이 된 것에 감복해서인지, 이 대표를 ‘아버지’ 로 불렀다니 ‘군사부일체’가 또한 그런 것이렷다.
한 때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던 대한민국 정치가 봉건적 언어를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역사적인 이유가 크다. 500년 넘게 이어진 조선왕조의 영향이 마땅히 있을 것이고 이후 36년 동안은 일본의 폭압적 지배와 일왕숭배를 강요받았다. 해방 후에는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체제가 상당 기간 유지되었고 그들은 군사문화를 학교와 사회에 도입했고 자신들의 정통성 강화와 이미지 정치를 위해 세종대왕와 이순신 등 조선시대 위인들과 상징물을 적극 내세웠다. 그런 탓에 우리 사회 곳곳과 언어 습관 속에는 봉건적 용어와 개념, 일제식 표현들이 많이 남아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로 비판 받을 만큼 대통령 1인에게 강한 권력과 많은 권한을 보장하는 한국의 대통령제 또한 봉건적 표현들을 큰 저항감 없이 수용하게 한다.
일본도 우리처럼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데다 정치명문가 위주의 세습정치가 만연한 탓에 현대 정치를 막부시대에 비유하는 글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역사가 긴 영국(왕조가 있었음에도!) 이나 필그림(영국을 떠난 청교도 이민자)이 세운 나라인 미국에서 그런 경향은 거의 없으며 총리나 대통령이 왕으로 표현되는 것은 거센 비판을 전제할 경우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졌을 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Imperial Presidency(제왕적 대통령: ‘친 케네디 인사’였던 미국의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 주니어가 만든 개념)’ 라며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7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대단한 모욕으로 간주되었고 닉슨의 하야를 촉진시켰다.
정치 이슈에 봉건적 표현과 비유를 쓰는 것은 언론이 선호하는 기사 작성법이기도 하다.
‘대권’, ‘잠룡’, ‘킹메이커’ 같은 말은 딱딱한 정치 현안을 보다 '말랑하게' 만들어준다. 러시아 소설처럼 무수히 많고 복잡한 정치 속 등장인물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해 지루하기 쉬운 기사를 무협지 처럼 가볍게 읽히게 한다. 때문에 봉건적 표현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클릭 수가 곧 돈인 언론사들이 쉽게 빠져드는 꼼수고 유혹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재미거리로 소비되기에는 우리에게 정치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높게 대우하거나 찬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 우상화된 정치인과 맹목적 팬덤이 가져오는 폐해는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다. 우리의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은 더욱 더 투명하고 민주적인 감시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여러 학자들이 연구했듯, 언어는 사고의 집이며 생각의 그릇이다.
존재가 어떻게 불리워지고 묘사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는 현상을 규정하고 우리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대통령의 분노가 ‘격노’ 로 표현되면 우리는 은연중에 그를 왕정의 절대군주처럼 인식하고,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의 노여움의 정도를 더욱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윤석열 격노' 키워드의 뉴스는 이태원 참사와 채상병 사망 사건 때 두드러지게 등장했다. 참사의 원인 규명이나 해병대 지휘관들의 실책, 사건에 대한 은폐를 밝히는데 집중할 때에 윤 대통령이 격노를 했는지, 누가 그런 전언을 했는지가 진실게임 양상으러 번지면서 이슈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 탓에 진짜 문제는 한참동안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태원참사와 채해병 사망 사건의 진실 규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권’, ‘킹메이커’ 같은 말도 거북하고 위험하다. 그런 표현을 말 할 때는 순간 재미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일 뿐인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봉건사회의 지배층으로 묘사하는 습관은 우리 안의 민주주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 뿐 그 어떤 유익도 없다.
볼 때 마다 오글거리는 표현인 '입성' 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제도의 일부인 국가기관을 '궁전'이나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높은 성채처럼 표현하는 것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촌스럽기 짝이 없다.
정치와 정치인들이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 양반이나 봉건 군주로 묘사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익숙해진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백성'으로 낮추어 인식하고, 자칫 저들은 국민의 위에 있는 것 같은 치명적인 착각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길게 돌아왔지만 결론은 이렇다.
재미로든 의도로든, 정치인이든 평론가든, 기자든 호사가든. 누군가 왕조시대의 언어로 민주주의 정치와 정치인을 설명하는 것을 지나치지 말자. 문제를 제기하고 지적하자. <소년이 온다>의 모델 문재학 열사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어리고, 죄없지만 그 자리에 있었기에 싸우고 죽었던, 누군가의 무수한 목숨에 빚져가며 어렵게 이룩한 삼권분립과 직선제 아닌가. 우리의 민주주의는 눈길을 끄는 말 몇마디, 비유 몇 줄로 가볍게 만들 일이 결코 아니다.
이 기사에 8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술술 읽혀요 감탄유익
명징하고 맛깔스런 글 고맙습니다.
라면으로 속 푸는 기분이에요~
믿고 보는 김선 논설위원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시 또 배웁니다. 이런 고품격 논설로 우리 언론의 수준을 높여 주세요.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이러면 아니 되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시면 사발이 올라올겁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말이 만드는 생각의 틀에 알게 모르게 휘둘리기 마련이지요. 공부가 되는 좋은 기사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날카로운 비판 논조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도 무의식적으로 쓰고 있던 용어이기에 우리 스스로 반성하게 되는 논조이기도 하네요. 정말로 우리나라의 새로운 정치를 위해서 우리부터 주의깊게 용어를 잘 써야되겠네요.
날카롭고 멋진 글입니다!
민주주의에 걸맞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김선 논설위원님 고맙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