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어느 날 처음 본 여자에게서 허벅지를 만지는 강제 추행을 당했다. 지인의 청첩장을 받는 모임 자리였고 좋은 취지의 장소이니만큼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태도에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서 고소를 진행했다.
가해자는 평소 흔히 얘기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성향으로 남자 성범죄자들에 대해서 격렬한 비난을 자주 SNS에 쏟아놓곤 했다. 그러면 본인은 더 자각해야 하지 않았을까. 처음 사과를 요구했을 때 행동과 언어는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고소를 결정하게 됐다. 처음부터 잡음이 많았다. 2차 가해였다. 가해자의 주변인들은 뭐 그까짓 일로 그러냐, 마녀사냥이다라며 나를 비난하고 가해자를 두둔했다. 처음에는 나도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나는 물론 SNS를 통해 사과문을 작성한 가해자의 행동을 보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게 됐다. 가관은 그 다음날 바로 남자친구와 낄낄대며 태그를 걸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고 올린 것이었다.
가해자는 40대 중반이다. 가해자를 주둔하는 주변인들 역시 4, 50대의 장년층이다. 현장에 있었지만 직접 그 사건을 보지 못한 가해자의 친한 남자 중년은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는 것 같았고 가해자의 남자친구보다도 더 열렬히 가해자를 지원했다. 평소 중절모를 쓰고 다니던 그 남성은 나를 굉장히 비난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무슨 이유로 그렇게 두둔했던 걸까.
청첩장 모임에 함께했던 아내는 그 중절모 남과 가해자가 주차장에서 영화 라라랜드를 찍듯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사건이 지나고 나서 처음 아내에게 이 사건을 얘기했을 때 그때 정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가해자가 너무나 나에게 몸을 밀착해서 얘기하는 바람에 나는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서 차렷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더 이상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로 나를 툭 치기도 했다. 다른 취한 여성분을 챙기느라 아내는 그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가 말하기 전까지 몰랐다.
고소장을 제출하고 나서도 두려웠다. 혹시나 무혐의로 사건이 끝나면 오히려 가해자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꼴이니 그것 봐라 하면서 더 의기양양해져 갖고는 2차 가해는 심해질 게 당연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원하는 수사 결과가 나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고소를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판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지인들에게 순대를 받아서 변호사분들께 상담을 받으면 내 정황을 이야기하고 처음 돌아오는 질문이 남자가 피해자라고요? 였다. 그러고서는 참고할 만한 판례와 사건이 없어서 얘기를 해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형사사건 1심 재판 후 가해자가 항소를 내서 2심이 진행될 때 한 변호사 분은 내가 판례를 만든 것 같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약식 명령으로 시작된 3심의 재판은 형량에 전혀 변화가 없었고 300만원 형의 벌금형이 유지됐다.
2년여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들의 2차 가해는 물론 극우 성향을 가진
2, 30대 남자들의 숟가락 얹기까지 있었다. 평소 래디컬 페미니스트 성향의 가해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나의 사건을 빌미로 가해자를 공격하려고 했고 남자와 여자의 성대결로 이끌어가려고 했다. 극에서 극의 다양한 스펙트럼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썼다. 나는 남자의 대표도 아니고 가해자가 여자의 대표도 아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고 개인의 신체적 자유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받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선을 그었다. 그랬더니 극우 성향의 청년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바뀌어 남자 페미라는 비난을 오히려 받았다.
법의 취지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가해자의 변호사 역시 법정에서 그렇게 말하며 가해자의 선처와 무죄를 판사에게 요청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곰탕집 사건이나 동탄 헬스장 사건처럼 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를 뜨게 하는 사건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남자든 여자든 고통에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책의 출간 발표에 아는 여자 동생으로부터 또 상담 요청이 들어왔다. 추행을 당했는데 고소하기까지 정말 힘든 결정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자신을 무기력하게 한다고 했다. 추행을 당한 또 다른 피해자는 오히려 가스라이팅을 당해 고소를 종용하지 말라고 자신을 나무란다고 했다. 나는 고소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며 앞으로 더 분노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기회를 놓치면 더욱 더 유죄 입증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자든 여자든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소중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때 검찰의 위원회에서는 추행의 성립 요건 중 피해자의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단순히 분노만으로 성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피해자에게 죄의식을 갖게까지 한다. 나의 사건과 책의 출간, 이 기회를 빌어 남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는 기회가 된다면 여자에게도 감히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