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는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인간 내면의 가치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기본권이 있다. 이러한 내면의 가치는 무한한 자유의 영역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국가가 당연히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한편, 우리 헌법 제37조 제2항에는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는 한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본권이란 것도 국가의 존립을 전제로 인정된다. 기본권 보장은 국가의 의무이므로 국가가 없으면 기본권 수호자가 없는 것이다. 국가의 존립은 공공의 질서유지가 전제 되어야 하며, 공공의 질서는 사회 공동의 가치 및 공적 약속을 지킴으로서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과 질서는 법률로서 구체화 된다.
법률은 언어로 되어 있다. 언어는 세상 모든 현상과 가치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므로 필연적으로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법’은 법률이라는 문자 자체가 아니다. 법률의 실체는 문자라는 창문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안다는 것은 법전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된 법을 ‘해석’할 줄 안다는 것이다. 법공부도 이러한 해석능력을 키우는 훈련의 과정이다. 법의 해석기준은 일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며 사회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법을 해석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입법취지’이다. 그 법을 만들고 도입한 이유를 근거로 문언의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그 법을 살아 있는 규율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공직선거법 사건, 편의상 ‘김문기 몰라요’ 사건에서 피고인은 ‘사실’과 ‘인식’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변론방식만 두고 보면 치졸하나 언뜻 또 그럴 듯한 논리로 보여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안다’ 또는 ‘모른다’는 인식의 문제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인지한 내용과 다른 말을 하더라도 거짓말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는 허위의 ‘사실’을 공표 했을 때 성립하는 범죄라는 점에서, 사람을 ‘안다’, ‘모른다’ 같은 인지여부에 대한 진술은 범죄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변론방식은 벼랑끝 전술에 해당한다. 김문기 몰랐다는 말이 거짓이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최후 방어선인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진짜 그를 몰랐다면 벼랑끝 전술에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피고인과 변호인 모두 이 부분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 김문기씨를 몰랐다는 주장이 스스로도 궁색한 모양이다.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는 유권자로 하여금 공직후보자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접하게 하는 것이 그 입법취지이다.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당한 편법, 유권자에게 착오를 일으키게 하거나 올바른 평가를 저해하는 방해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 법의 목적이다. 이러한 입법취지에 비추어 당사자인 후보자가 자신에 대한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의도가 있었는지(고의) 그리고 그 사안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중대성이 있는지 등을 중요하게 살피는 것이 실무이다.
이재명 대표가 각종 방송과 인터뷰에서 받은 ‘김문기씨를 아느냐?’는 질문은 단순히 그를 인지하고 있느냐가 아니었다. 이른바 대장동 사업과 관련해 후보자가 어디까지 개입이 되어 있는지에 대한 간접사실에 해당하는 하나의 단서로서 묻는 것이었다. 김문기씨를 알았다고 하면 대장동 사업으로 민간사업자에게 특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진 했다는 지점까지 방어선이 뚫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후보자로서는 자신이 받을 정치적 득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말은 이러한 분명한 의도가 담긴 정치활동에 해당하는 것이고,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가 금지하고자 하는 범주에 정확히 맞닿아 있다.
나아가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를 반복하였다. 한번의 즉흥적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인지여부에 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그 부분이 후보자의 자질을 판단하는 중요한 사실이 된 시점부터는 더 이상 인지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잠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토록 중요한 질문을 받고 난 후라면 자료나 기록을 찾아 기억을 환기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김문기를 몰랐다고 진술했다. 김문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몰라야 하는 것’, ‘모르고 싶은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이는 본인 스스로도 이 문제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이슈라는 인식을 가졌다는 방증이다. 즉, 김문기를 ‘안다’ 또는 ‘모른다’는 사실은 더 이상 개인의 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국가적 의미를 갖는 쟁점이 된 것이다.
헌법상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고 이미 결정한바 있다. 그것이 개인 내면에 머무르는 한도에서는 자유지만 표출되어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에 관계된 경우에는 더 이상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양심 및 종교를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법률로 처벌하고 있으며, 포교활동의 방식에 대한 제한과 종교활동이 공공질서에 영향을 주는 경우 법률에 의해 제재를 가한다. 즉, 헌법상 내면의 가치도 무한한 치외법권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이 사건은 어떻겠는가? 일반 국민이 누구를 알고 말고는 인지의 문제니 이를 법이 간섭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건축 인허가권을 가진 시장이, 자신이 추진한 사업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핵심 실무자였던 김문기씨와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 잡아 떼는 것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의 문제가 아니다. 인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으로 나온 것이며 공직선거법이 금지하는 내용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재판부가 이를 인지의 문제라는 철학적 근거로 무죄를 선고한다면 초월적 치외법권을 두는 것이 된다. 헌법상 기본권도 제한을 두는 법현실과도 동떨어진 것이다. 사회국가 질서를 수호해야 할 사법부의 책무를 방기한 것이다. 법의 취지를 회피해 문자의 한계를 비집고 들어가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부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원이 그 본연의 역할만 해주기를 기대한다.